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하마드 나지불라 (문단 편집) === 대통령 재임기간 (1987~1992) === 대통령이 된 나지불라는 국호를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에서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으로 변경하고, [[사회주의]]식 경제 체제를 버리고 일단의 시장 경제 체제를 아프가니스탄에 도입했다. 그리고 1978년 공산 정권 출범 이래 사실상 내전 상황에 놓여 있던 아프가니스탄의 불안정한 정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국 내 여러 비공산 정치 세력들과 무자헤딘 반군 측에게 인민민주당 1당 공산 독재 정치 철폐와 연합 정부 수립 등 일단의 유화 정책을 제시했다. 그러나 [[무자헤딘]] 측은 이러한 나지불라의 제안을 거부하면서 나지불라의 유화 정책은 실패로 끝났고 결국 정권에 비교적 협조적이고 무자헤딘에게 적대적인 일부 비공산주의 세력들만이 나지불라 정권에 참여했으며,[* 근데 이마저도 인민민주당 세력들이 다수석을 차지하였기에 별 의미는 없었다.] 나지불라 정권 말기이던 1990년에는 무당파 출신의 정치인인 파잘 하크가 나지불라 정권 아래에서 총리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한편 무자헤딘에 대한 유화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대통령 임기 초반이던 1987년과 1988년에 나지불라는 소련군과 함께 무자헤딘에 대한 토벌 공세에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 했다. 그러던 [[1988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래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고 있었던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하면서 나지불라의 운명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지불라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이 철수한다면 아프가니스탄은 끔찍한 피바다가 될 것이라며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아프간 철군 계획을 비난하며 철회를 요청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은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더라도 현 아프간 정부에 대한 무기 지원 등은 계속해서 이어갈 것이라고 나지불라를 설득했고, 그에 따라 [[198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한 뒤에도 나지불라는 이어지는 소련의 무기 지원 아래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련군이 두고 간 전투기, 전차, 공격헬기, 미사일 등 막대한 무기들과 계속해서 이어지는 소련의 지원으로 나지불라는 무자헤딘에 대한 강력한 진압 작전에 나서면서, 아프가니스탄은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간의 [[내전]]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한편 소련군이 철수하고, 무자헤딘 반군과 나지불라 정부군 간 내전이 진행될 무렵, 나지불라는 정권을 공격하는 무자헤딘 세력들을 약화시키기 위한 갖가지 심리전을 벌였다. 이슬람주의를 이념으로 삼는 무자헤딘 반군들을 흔들고 국민의 민심을 정부 편으로 돌리기 위해 직접 모스크를 찾아가 예배하는가 하면, 자신의 권력에 이슬람주의 성향의 종교 지도자들을 어느 정도 끌어들이기도 하고, 자신은 [[이슬람]]을 적으로 돌리지 않으며 본인도 이슬람을 숭앙하는 무슬림이라고 주장하며 공개적으로 자국 내 이슬람 세력들의 지지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심지어 적대 세력인 무자헤딘 내부에서 반군 간의 내분이 일어난 사실도 간파하여 1989년 6월 [[잘랄라바드]]에서 나지불라의 정부군이 내분으로 세력이 약화된 무자헤딘을 상대로 승전을 거두는가 하면,[* 전투 초반에는 무자헤딘이 도시를 통제하던 정부군 세력을 포위전으로 공격하여 도시를 함락시켰지만, 카불 외곽 지역에 주둔하던 정부군 측이 무자헤딘이 장악하고 있던 잘랄라바드 시를 연결하는 도로를 공격, 점령하고, 도시를 차지한 무자헤딘에게 반격을 가해 잘랄라바드를 탈환했다.] 1989년 2월 소련군 철수 직후에 일어난 수도 카불 함락을 겨냥한 무자헤딘의 1차 공세를 저지시키고, 그 이듬해인 1990년 10월에 있었던 카불에 대한 무자헤딘 측의 2차 공세도 격퇴하여 수도 카불을 방어/사수하는 기염까지 토했다. 거기에 나지불라는 무자헤딘 진압을 앞세우면서 한편으론 무자헤딘에게 평화회담을 제의하거나 또는 무자헤딘 반군병과 간부들에게 항복, 귀순을 권유하여 투항한 무자헤딘 반군을 정부군 소속 민병대로 편입시키는 등의 삼중 전략도 사용하여 무자헤딘 세력들을 압박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현지 사학계에서는 1978년과 79년 이후 아프가니스탄 역대 공산정권의 독재자들 중 아예 대놓고 무신론 공산주의 노선을 고집하며 이슬람 향촌 세력들을 적으로 만들어 내분을 악화시켰던 타라키와 아민이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군에 의해 집권한 뒤에도 소련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도 무자헤딘과의 전투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전임 지도자인 카르말에 비해 나지불라는 상당히 기민하고 영악한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내릴 정도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자헤딘과 나지불라 정부군 간의 무력충돌은 지속적으로 이어졌고, 내전이 장기화되고 사회불안이 가중되자 나지불라는 군대의 힘을 빌어 강압적인 권위주의적 독재 정치를 펼쳤다. 그러던 [[1990년]] 일부 정부군 장성 인사들이 나지불라를 축출하기 위해 군사 쿠데타를 모의, 시도했지만 나지불라는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군부의 쿠데타를 진압했다. 특히 나지불라 정권을 겨눈 정부군의 쿠데타 진압 과정에서 당시 정부군 국방장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샤나와츠 타나이 장관이 쿠데타에 가담했다는 혐의가 밝혀져 당시 나지불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결국 쿠데타 진압 후 나지불라는 타나이 장관을 비롯하여 쿠데타에 가담했던 정부군 장군들을 모두 체포, 해임하거나 사형시키는 조치를 내렸는데[* 하지만 정작 쿠데타의 가담자들 중 타나이 국방장관은 파키스탄으로 도주/망명했으며, 2022년에 망명국인 파키스탄에서 지병으로 숨졌다.] 문제는 나지불라가 이 당시 숙청한 정부군 장성의 상당수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소련 철수 후 일어난 내전에 직접 참전해 무자헤딘과 싸우던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인재]]들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의 부재로 인해 1989년까지 잘랄라바드에서 무자헤딘을 상대로 승전할 정도로 굳건했던 정부군의 전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내전의 전세가 무자헤딘 측에게 유리해지는 악영향을 초래했고, 1991년 3월에는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국경 지대에 위치해 있던 정부군 장악도시이자 군사 요충지인 호스트 시를 둘러싼 무자헤딘과 정부군 간의 전투에서 정부군은 참패하고 도시를 빼앗겼다. 하지만 당시 나지불라 입장에서는 이들에 대한 숙군을 안 할 수가 없었던 게 당시 쿠데타를 주도했던 이들은 타라키와 아민의 할크파에 속한 인물들이었고, 이들은 카르말과 나지불라가 속한 파르참파에게 매우 적대적이었다. 거기에 파르참파는 할크파가 집권했던 공산정권 초기 시절에 할크파에 의해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소련-아프간 전쟁과 무자헤딘과의 내전에서 실전 경험이 있었던 이들 할크파 출신의 정부군 장군들이 쿠데타 혐의로 인해 대거 숙청되면서 나지불라 정부군의 전력이 약화된 것도 사실이며 실전력을 갖추고 있었던 할크파 정부군 장군들이 숙청된 이후 나지불라 정권은 정부군의 모든 전력을 당시 쿠데타를 진압하는데 앞장서며 타나이의 뒤를 이어 신임 국방장관이 된 모하마드 아슬란 와탄자르 장군과 누르 울 하크 울루미 장군, 술탄 알리 케시트만트 전 총리 등 나지불라 정부를 지지하던 군부/정권 내의 소수 파르참/할크파 핵심층들,[* 와탄자르는 할크파 출신이었음에도 파르참파 출신이던 나지불라 정부를 지지했다.] 마자르이샤리프 등 북부 지역의 정부군 점령지를 통제하고 있던 우즈벡족 출신 지도자 [[압둘 라시드 도스툼]]이 이끄는 친정부 민병대를 중심으로 재편해 작전 및 전투를 수행했다. 그리고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간의 전쟁이 3년 동안이나 이어지면서, 정부군의 민가 약탈과 민간인 학살 같은 만행들과 무자헤딘을 잡기 위한 공군기의 지상공격으로 애꿎은 민간인들이 죽고 다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국민들은 나지불라 정권을 비난하였고, 장기적으로 민심 유지마져 실패한 나지불라 정부군은 [[1989년]] 잘랄라바드 전투와 [[1990년]] 정부군의 쿠데타 모의 이후에 있었던 여러 전투에서 무자헤딘에게 패퇴에 패퇴를 거듭했으며, 정부군 내부에서도 군에서 탈영하거나 무자헤딘 쪽으로 투항, 전향하거나, 자지불라 정부에게 불만을 느끼는 병사와 장교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정국 상황이 안정은 커녕 악화일로를 걷게 되자 나지불라는 대통령직 사임을 여러번 시사하기도 했으나 측근들의 만류와 반대,--각하 전시 상황에 사임이라뇨--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 정치인들의 부재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고[* 나지불라 행정부 아래에서 부통령과 총리직을 역임했던 정치인들이 존재했지만 이들은 나지불라보다 더 나이가 많은 1920~30년대생 노인들이라 내전 상황인 아프가니스탄의 정국을 이끌만한 인재가 되지 못했다.] 결국 계속 대통령직에 남았다. 더욱이 엎친데 덮친격으로 [[1991년]] 12월 [[소련 해체|아프간 나지불라 정권의 후원국이었던 소련이 해체되었고]], 옐친 정권은 아프간에 대한 모든 지원을 1992년 1월부로 중단한다고 선포했다. 이 때문에 소련군 철수 이후에도 이어져 오던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소련의 지원마저 끊기면서 나지불라 정권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이 틈을 노린 무자헤딘은 1991년 연말과 1992년 연초 사이에 수도 카불을 제외한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주요 거점지들을 장악하며 승기를 잡았다. 그리고 [[1992년]] 4월 무자헤딘이 수도 카불에 대한 대대적인 대공세에 돌입하자 유엔은 나지불라를 압박하여 대통령에서 퇴임하고 과도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대책없이 나지불라를 핍박해서 그가 대통령에서 물러날 의사를 표명하게 하자마자 카불 정권은 순식간에 붕괴되어 장관들은 각자 연줄이 있는 군벌들에게 우르르 붙어버렸고 카불 방위부대와 공항까지 죄다 전향해버렸다. 이 때문에 유엔 비행기를 타고 망명할 계획이었던 나지불라는 공항으로 가는 도로 검문소에서 막혀서 암호를 요구받는 상황이 되었다. 나지불라는 자신의 통치력이 카불에조차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대로 [[국제연합]](UN) 구역으로 달아났으며 그것이 나지불라 정권의 최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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